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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란 무엇일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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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란 무엇일까? (1)을 포스팅 하고나서 많은 고민을 했다.

사실 어느정도 결론을 내려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결론이란게 뭔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이 아닌 "그냥 그러는게 당연"하다고 느꼈던거라 일단 설득력이 떨어져보였고, 내 포스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크리스챤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약 2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적절한 "성경적"인 결론은 찾지 못했다.

찾은거라곤 "주기도문[각주:1]"에 나온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정도?


그러다가 예~~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용서에 대한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옮겨보고자 한다.



용서의 필요성


환자 중에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심한 구박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제가 그분들께 가서 그분들이 어떤 식으로 제게 상처를 주었는지 속속들이 말하고 만약 그분들이 제게 용서를 구한다면 기꺼이 용서해드릴 자신이 있어요. 아니, 제 말을 그냥 귀담아듣기라도 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당신들께서 제게 상처를 주었다고 말씀드리면, 부모님은 내가 사실을 너무 부풀리고 있다면서 오히려 저를 탓하세요. 우리 부모님은 자기가 했던 일조차 기억하려 하지 않아요. 저 혼자서만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분들은 제게 온갖 고통을 주었어요. 장담하건대 부모님은 눈곱만큼도 고통을 겪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제가 그분들을 용서하리라고 기대하시는 겁니까?

나는 그에게 "물론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한 까닭은 치유를 하는 데에 용서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이런 환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부모님이 당신에게 잘못했다고 빌거나 또는 당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든 그러지 않든 간에, 당신이 부모님을 용서할 때까지는 당신은 여전히 괴로운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의 필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환자들에게서는 몇가지 공통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한 환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나쁜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늘 이 자리에 앉아 우리 부모님이 했던 온갖 나쁜 일만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이건 그분들께 불공평한 일이에요. 우리 부모님은 좋은 일도 하셨어요. 어딘가 공정하지 않다고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좋은 일도 분명히 하셨어요.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눈앞에 있군요. 당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거죠. 만일 그분들이 제구실을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껏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나쁜 일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서튼의 법칙 때문이에요."

내 대답에 환자들은 나를 멍하니 처다보면서 이렇게 되묻곤 한다.

"도대체 서튼의 법칙이 뭐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유명한 은행 강도 윌리 서튼의 이름을 따서 붙인 법칙입니다. 기자들이 서튼에게 물었어요. 왜 은행을 터느냐고요. 그랬더니 서튼의 대답이 걸작이었죠. '돈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고 말했거든요.

정신과 의사가 나쁜 일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는-우리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위해서도-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곳에 과거를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곳에 상처와 흉터가 있고, 바로 그곳이 치료가 필요한 부위이기 때문이다.

처음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 가운데에는 또 다른 성질의 더욱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붇는다.

"왜 지나간 일에서 이 모든 일들을 들춰내야만 하나요? 그냥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건가요?"

과거에서 무언가를 들춰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 무엇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간에 없던 일처럼 잊어버릴 수가 없다. 용서라는 어렵디어려운 일을 피해보려고 마음의 상처를 꾹꾹 눌러보지만 결국 온전히 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용서뿐이다.

사람들은 억압이라는 심리적인 과정을 통해 가끔 거짓된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일어났던 어떤 일에 관한 기억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의식적으로는 그 일을 기억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일은 그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유령이 돼서 그 일을 기억하던 때보다 더욱 사태를 나쁘게 이끌고 간다.

예를 들면 2~3년이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 아버지나 의붓아버지에게서 반복적으로 성적 학대를 받아온 여성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게 가능하다. 이 여성은 그 일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는 치료를 받게 된다. 그 까닭은 대부분 인생을 살면서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심한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런 유년기의 경험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그녀를 헤집고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환자들에게 어떤 일에 관해서 정말로 잊어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별 고통 없이 그 일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그 일과 친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안전한 관계를 맺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이미 저질러진 죄를 기억하는 것이다. 분노는 그런 후에야 필요하다. 죄를 지목하고 재판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분노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분노가 일정한 도를 넘어서면, 즉 우리가 오랫동안 분노에 집착할수록 더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줄 뿐이다.

용서의 과정은 전적으로 이기적인 상태로-실제로 용서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진행된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까닭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는게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화를 내며 "이거 다 네가 꾸며낸 거지?"하고 말하기 십상이다. 심지어 그들은 아예 무감각할 수도 있다.

용서를 하는 까닭은 자신을 위해서다. 특히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용서한다. 왜냐하면 얼마간의 분노가 치료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정도를 넘어서 분노에 집착하면, 성장은 그대로 멈추고 영혼은 시들시들 죽어가기 때문이다.

-"M.스캇 펙"의 "끝나지 않은 여행"中-


이 책은 "아직도 가야 할 길"로 유명한 "M.스캇 펙"박사가 쓴 책인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속편이다.

"M.스캇 펙"박사는 심리상담가로서 용서라는 주제에 대해 어떻게보면 내가 원한 "성경적"접근보다는 좀 더 인문학적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금은 더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용서를 하는 까닭은 자신을 위해서다"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 대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나 자신을 좀먹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상하게 한다. 소위 성격 버린다고나 할까.


하지만 용서를 하는 방법도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소위 "값싼 용서"는 실제적인 용서와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M.스캇 펙"박사는 같은 책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값싼 용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값싼 용서'라고 지적했던 문제를 지금 실제로 겪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와서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 어린 시절이 아주 좋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고 나는 그분들을 용서했지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서서히 관찰해가다 보면 그들이 부모를 전혀 용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용서했다고 믿고 있을 따름이다.

나의 경우, 이런 사람들을 치료할 때 언제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이들의 부모를 심판대 위에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 일은 상당히 복잡하다. 왜냐하면 기소와 변론이 필요하고 최종 판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소와 재항소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너무나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 도중에 값싼 용서를 택하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가 발휘되려면 유죄 평결이 났을 때만이 가능하다.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에요. 그분들은 더 잘하실 수도 있었어요. 부모님은 제게 잘못을 저지르신 거예요.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두고서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용서란 죄가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 자식간의 문제는 어쩌면 좀 더 용서하기 쉬울 수 있다.

어쨌건 혈육이니까...

하지만, 영화 "26년"이나 "남영동1985"의 주인공들은 과연 어떨까.

정당한 댓가를 치르지 않고 그저 용서를 해주는 것을 "나라면" 절대 원치 않을 것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리가 이때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잘 알듯이 이 원리는 용서에 관한 원리가 아니라 더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는 것을 막는 원리다.

왼뺨을 맞으면 상대방의 왼뺨을 두대 때려야 속이 풀리는게 인지상정인지라.

보복과 보복이 계속되면 결국 서로 되돌릴 수 없게되고 결국 살인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개인대 개인이 아닌 가족대 가족의 문제가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혈맹간의 문제, 국가간의 문제로도 커질 수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방편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리다.


아무튼

정리해보자면,

진정한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다.

값싼 용서는 진정한 용서를 방해할 뿐이고, 결국 나 자신을 좀먹게 한다.

진정한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고,

그 사건을 덮어두거나 잊어버리는게 아닌 그 사건을 떠올려도 침착해질 만큼 그 사건과 친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필요하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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