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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캘러-기독교는 21세기 영국 및 서구 사회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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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리디머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제가 참 좋아하는 신학자인 팀 캘러 목사가 지난 6월 19일, 영국 의회 조찬 기도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문화가 기반이 된 서구 사회와 우리나라와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현재는 우리나라도 서구 사회의 문화가 많이 들어와있고 정치나 철학의 영역은 사실상 서구 사회와 다를바 없다고 보기때문에 충분히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는게 많은 설교라고 봅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헌법은 국민 주권의 가치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까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국민은 평등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서구 사회와 거의 동일한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가치가 충돌하는 이 시대에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다짐하게하는 좋은 설교라는 생각에 여기에 옮겨놓습니다.

관련한 내용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https://www.nationalprayerbreakfast.org.uk/


물론 저는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기때문에 한국어 자막 작업이 된 영상을 봤습니다.

(아래 설교 텍스트는 이 영상의 자막을 옮긴 것입니다.)


아이삭 와츠는 '기이한 영광'에 대한 찬송가를 썼지요.
제게도 참 기이한 일입니다.
미국인이 여러분께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말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영광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이 주제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주제는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21세기 영국 및 서구 사회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가?"


방금 읽어드린 성경의 아주 유명한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대답을 해볼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예수는 '소금'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기에 소금이 들어가면 짠 맛을 내는 동시에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한 편으로는 고기의 풍미가 살아나면서 최상의 맛을 끌어 올리고
동시에 부패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요.
이것은 소금이 화학적으로 고기와 완전히 달라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화학적으로 소금과 고기가 동일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죠.
예수님 비유의 청중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상은 그냥 '땅'이 아닙니다. 세계와 사회를 뜻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는 말하길,
어떤 사회이든지 그리스도인들은 각 문화에서 최상의 것을 끌어내는 존재이자 그 문화의 나쁜 것들을 막아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즉 세상과 다른 존재일 때 말이지요.
조금 더 이야기를 풀어가 보지요.
기독교가 서구 사회에서 어떻게 소금 역할을 했는지 살펴봅시다.
지금도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지킨다면 말이죠.
고기에 도움이 되려면 고기와 같아서는 안되고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자 세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독교는 이미 이 사회의 소금 역할을 엄청나게 해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구요.
아메리카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한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서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방식입니다.
학생들에게 사고 실험을 하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늦은 밤에 당신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있습니다.
저기 나이 든 여인이 다가오는 군요. 보석과 돈으로 가득 찬 큰 지갑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고 실험에서 여러분이 아는 것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 여인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둘째, 지갑을 빼앗는다 해도 여인은 여러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이 상황 안에서 여인의 지갑을 빼앗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이 사고 실험을 위한 설정입니다.
그녀는 저항하지도 않을 것이고, 여러분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빼앗는 것이 불법도 아닙니다.
여러분이라면 빼앗겠습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던진 첫번째 질문은 빼앗겠냐는 것입니다.
지금껏 학생들의 대답은 상상하시는대로입니다.
빼앗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실험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모든 학생들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겠지요.
그가 말하길,
"그 이유에 대한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 중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군요.
A. 그 지갑을 빼앗는 것은 내가 열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내가 수치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기에,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곧 내가 열등한 인간이 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니까.
B. 여인을 생각해서 빼앗지 않는다.
이 돈을 잃는 것이 여인에게 어떤 것일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식구들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C. 다른 어떤 이유로.
위의 선택지에 없는 이유 말입니다."

지난 수년간 상상하시는대로 학생들은 100% B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A는 자기 지향적 윤리입니다.
이는 수치-명예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문화는 힘과 명예가 가장 중요하지요.
B는 타자 지향적 윤리입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한 궁극적 가치이죠.
앵글로 색슨 족이 처음 수도사들을 만났을 때, 이교도 앵글로 색슨 족이 수도사를 만났을 때 말입니다.
이들은 수치-명예 문화에 젖어있었고, 이들이 약탈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수도사들과 만나게되자, 
타자 지향적 윤리, 사랑의 윤리를 가진 시독교 수도사들 말입니다.
앵글로 색슨 족들은 이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 사회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힘에 대한 숭배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사회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기독교인들이 승리했지요.
살아남은 것은 기독교였습니다."

이 교수의 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신을 믿는지도 관심 없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도덕적 감각은 동양이나 고대의 명예-수치 문화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힘을 가장 중요시하는 문화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의 윤리이고 기독교에서 온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말했습니다.
사람이 지닌 사회적 계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야 합니다."


자, 이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보시면 이것이 서구 문명화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지금도 진행중인 수 많은 연구들이 있습니다만 간략하게 살필 수 밖에 없겠군요.
코넬 대학교의 브라이언 티어니를 비롯해 수 많은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인류라는 개념이, 동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개념이 계몽 시대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중세에 나타났으며 기독교와 성경에 기인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모든 고대 사회는 노예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노예제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며 노예제의 실행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한 첫번째 사람은, 인간은 영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사고 파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은 니사의 그레고리였습니다.
307년대에 아주 유명한 설교문을 남겼죠.
그는 말하길, 참고로 이것은 화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의 오볼로스를 주고 하나님의 형상을 샀는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을 팔고 얼마의 스타테르를 받았는가?
인간의 가치를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의 영혼은 전 우주와도 바꿀 수 없다고!"

니사의 그레고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인간을 사고 팔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그 당시 이러한 생각은 유일무이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꺼낸 최초의 목소리였습니다.
"어떤 인간도 사고 팔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노예제는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브라이언 티어리는 지적합니다.
"중세를 지나는 동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상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양도할 수 없는 인권'으로 발전해 갔다.
인종과 계급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 없이 말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설교에서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성경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인간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독특성과 가치와 존엄성을 부여합니다.
한 국가로서 절대 다음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차별이 없으며,
높은 음역대의 흰 건반으로부터 낮은 음역대의 검은 건반까지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키보드에서 모두 똑같이 중요합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차별에 대하여 비폭력이라는 힘으로 맞서는 이유입니다."

위르겐 하머바스는 조금 다른 어조로 말합니다.
"양심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이상들은 유대교의 정의의 윤리와 기독교의 사랑의 윤리라는 유산에서 기인했다."

이렇게 인권이라는 개념이 전 세계의 각 영역들로 퍼져 나갔습니다.
또 다른 학자 데이빗 하트는 보편적 박애하는 현대의 이상에 대해 말합니다.
모든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하고 모든 배고픈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죠.
보편적 박애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사상입니다.
이는 기독교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났습니다.

제가 성(sex)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을까요?
예, 감히 해보겠습니다.
고대를 연구하는 카일 하퍼라는 저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Shame to Sin'이라는 뛰어난 책에서 이렇게 썼지요.
기독교가 시작되던 때, 로마 세계의 성 윤리는 전적으로 수치-명예 문화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윤리는 사회의 질서 곧 위계 질서를 떠받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여러분이 지위가 높은 남성이라면 결혼을 했다고 해도 원하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지 못하죠.
또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어떤 여성도 지위가 높은 남성이 요구하는 성 관계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절대 거절할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옴과 함께-카일 하퍼는 이를 제 1차 성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모든 성 관계는 상호 합의 하에, 약속 하에 이루어져야 했다'고 말합니다.
성 관계는 언약 안에서 상호 동의 하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타자 지향적 사랑의 윤리라는 기독교적 개념이 사회 각 영역에서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사라 윌리엄스가 이 자리에서 여성의 권리와 참정권을 기념하는 연설을 할 것입니다.
그치만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보여주는 바 서구에서 그 뿌리는 기독교와 성경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기독교가 언제나 소금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광의의 차원에서 소금 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수 많은 이상들이 기독교와 성경의 산물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 무엇을 제공해줄 수 있는가'라는 말 자체가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이죠.
이와 비슷한 겁니다.
'최근에 너 나한테 뭐 해준거 있어?'
그치만 이렇게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과거에 기독교는 서구의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 주는 소금이었다면,
시간이 지난 기독교는 주로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한다고 말입니다.
주로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저명한 캐나다 철학자인 찰스 테일러가 말한 한 가지 문제를 이야기해 보지요.
제 이야기에 대한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찰스 테일러의 뛰어난 책인 <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형성>에서 그는 현대 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모순에 대해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지점에서 니체를 따르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따르고 있지요.
찰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현대 문화는 철저하게 도덕적 가치들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한 편으로 우리 문화는 역사상 그 어떤 사회와 견주더라도 가장 높은 도덕적 이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각 인류가 평등하다고 믿으며, 우리는 모든 국가 집단과 종족 집단 가운데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지구 위의 모든 인류가 고통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의 도덕적 이상이다.
한 편으로 이런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 현대 문화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거나 진화 생물학적 산물이기에 모든 도덕적 가치는 주관적 선호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이다."

찰스 테일러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높은 도덕적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받쳐줄 도덕적 기반은 없다."

고귀한 도덕적 이상을 자랑하는 동시에 모든 도덕성은 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것이 거대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말합니다.
높은 도덕적 이상을 받쳐줄 도덕적 토대가 없는 것이 말이죠.
왜 이것이 문제일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런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니지만 문제이긴 하지요.
어떤 현대인이 인권이나 평등에 대해 말하려 하는데 누군가가 이런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기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전 미국 대법관 앤서니 케네디는 도덕성에 대한 현대의 관점을 잘 포착했습니다.
잘 알려진 판결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의 중심에는 존재, 의미, 우주, 인생의 신비를 자기 나름대로 정의할 권리가 있다."

이는 분명 오늘날 문화가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의 의미를 정하는 것은 너다!
옳고 그름을 정의하는 것도 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대도 뭐가 문제입니까?
왜 내가 인권을 존중해야 하죠?
찰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고상한 이상을 지닌 서구인이 이에 반대하는 비서구인을 만났을 때 '당신네들은 계몽되지 않았다'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서구 백인의 제국주의와 같은 것이며 비 서구권은 영원히 우리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우리처럼 교육받고 계몽되면 너희들도 이해하게 될껄?"

도덕적 토대 없이 높은 도덕적 이상만 있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우리의 이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 사회가 이런 이상을 지닌 사람들을 길러낼 수 있을까요?
이런 높은 이상은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찰스 테일러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네 자신에게 솔직해지라'고 말한다.
'네 내면의 빛을 따라가라. 그 누구도 네게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
가족이, 공동체가, 사회가 뭐라 하든 네 자신에게만 솔직해져라!
그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 없다.
그들이 너에게 맞추도록 만들거라'"
그러고 나서는 이렇게 말한다.
'정의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굶주린 자들을 위해 일하거라.'
곧,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과 재산과 온갖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찰스 테일러가 <자아의 원천들>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자 한 무신론자가 서평을 남겼습니다.
"인내와 가치는 자기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기 희생이라는 가치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
가장 일반적인 동기 혹은 가장 논리적으로 가까운 것이 신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테일러는 신중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의 자유는 모든 초월성의 배제를 수반하기에 현대의 가치들은 전적으로 우발적인 것이 된다.'
'신 없이도 괜찮을 수 있을까?'라는 테일러의 의구심은 나를 주눅들게 한다."

이에 대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 테일러가 말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화지요.
펜실베니아의 제가 자라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2006년 10월, 총을 든 남자가 아미쉬 공동체의 학교 건물에 난입했습니다.
학생들을 인질로 잡았지요.
이 사태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는 5명의 여학생을 쏴서 사살했습니다.
7세에서 13세의 학생들이었지요.
그리고 그는 자살해 버렸습니다.
총기 범죄가 일어난 후 아미쉬 공동체는 동네에 살고 있던 가해자의 부모에게 모여 들었고 가해자의 아내와 세 자녀를 찾아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을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얼마나 힘드세요. 저희가 함께 있어 드려도 될까요?"

가해자의 장례식이 열렸을 때 그 장례식의 절반 이상이 아미쉬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미쉬 대변인은 '자녀를 잃은 모든 가족들이 가해자와 그 가족을 용서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이 사건에 대한 수 많은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모두가 이들의 사랑과 화해의 능력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이것이 미국인이 해낸 것이다. 선한 미국인의 끝을 보다!'
2,3년 후 세 명의 사회학자들이 <아미시 그레이스>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에서 그들이 말하길
"서구 사회가 이런 사람들을 더 만들어 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용서는 자기 포기의 행위이자 자기 희생의 행위입니다.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죠.
되갚아 줄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자기 포기이자 자기 희생인 것이죠.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말하길
"우리의 문화는 급격히 소비주의, 개인주의화 되고 있으며 이는 자아실현을 가르친다.
이는 자기 확신을 가르치며 결코 자기 포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이어서 말하길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낳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권력을 나누고 희생을 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아미시 문화는 기독교에 기반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이들의 토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로 우리는 구원받았다.
그에게 모든 영광이 있고 그에게 모든 권세가 있으며 그를 배신한 피조세계에 진노할 권리가 그에게 있다.
그 대신 그는 이 모든걸 포기했고 그는 포기하고 포기하고 포기하며 자기 영광까지 포기하고는 인간이 되었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십자가로 나아갔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까지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며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그 사회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내어줌으로 구원받았다는 그 기반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된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거라.
네 자신을 찾고 싶다면 네 자신을 잃어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라!'
이런 것들이 아미시 공동체에 깊숙히 새겨져 있었고 그 결과 이들은 이런 일을 했지만 우리에겐 그런 가르침이 없다."

자아 실현과 자기 확신을 양산해 내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줌으로 형성된 수 백만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줌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죠.
"그러므로 저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삽니다.
그 분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거든요."

자, 마지막 요점입니다.
예수는 비유로 '그리스도인이 소금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소금으로 남아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고기와 같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이 둘은 다릅니다.
따라서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다면 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르지 않다면 자아실현으로 가득찬 세상에 별 유익을 주지 못 할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말이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온전히 형성되지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할것입니다.
최근 에든버러 대학의 래리 허타도 교수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책들을 냈습니다.
그 중 한 책의 제목이 이것입니다.
<1~3세기 사람들은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책의 서두에 그는 말합니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 가장 박해받던 종교였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질문이다."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유익이 전혀 없던 때 대체 왜 기독교인이 되려했을까요?
사회에서 얻게될 유익이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두 가지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기독교의 공동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허타도 교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파벌과 가문에 속해 있었고 오늘날의 우리처럼 외로워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공동체를 찾아 다니는 사람이 없었죠.
그들이 기독교에 발을 디딘건 공동체 때문이 아닙니다.
혹자는 기독교가 기적적인 치유를 행해서 그런게 아니냐고 합니다.
네 그치만 다른 종교들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뭐가 달랐을까요?
사회적 이익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점점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왜일까요?
허타도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이는 신들이 내려주는 은총이 아닌 신과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거저 주어지는 선물인 영생을 통해서 말이죠.
다른 종교들은 열심히 일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서 이를 성취해야 했습니다.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여러분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자, 여러분이 그분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보잘 것 없고 자격도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사랑 받은 사람이다!
온전하고 불변하며 정죄없는 사랑을!
그분의 희생으로 인하여!"

이것이 바로 우리를 소금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갖 가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로부터 타자 지향적 윤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의 영원한 가치가 이곳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이 세상과 다른 존재일 때 사회에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이 사회와 다른 존재로 서 있을 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줄 때 말입니다.
영국 사회가 기독교인들로부터 큰 유익을 얻기 위해 해야할 것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같아지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성을 믿고 존중한다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다름을 존중합시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에게 해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 영국 사회여,
영국 사회를 향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있다면 바로 지금인 것 같군요.
오 영국 사회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해주십시오.
'당신들의 이상에 솔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이상 위에서 이 사회를 비판하십시오!
다른 이들의 이상에 기반해서 비판하지 말고 자기 기반 위에서 비판하십시오!'

이 얼마나 공평한 일입니까?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비판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고 공평한 일입니까.
또한 영국과 서구 사회에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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