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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하는가? (Does God Ex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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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의 홈페이지(http://www.reasonablefaith.org)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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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문을 번역한 글을 바탕으로 제가 읽기 쉽게 편집,수정했습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Does God Exist?) 
By Dr. William Lane Craig
Translated by Dr. Song-Chong Lee

 
씨 에스 루이스(C.S. Lewis)는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라고 주장했다.
만약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관해 어떠한 흥미도 가질 이유가 없지만, 반면에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중대한 관심사가 되야하고, 일상 하나하나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우리가 의존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삶의 궁극적 관심으로 분명하게 논의되야 할 대상인 것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해도 그것이 무슨 대수냐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20세기 무신론 철학의 대가인 사르뜨르(Sartre)나 까뮈(Camus)조차도 신 존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관한 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은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어진다.
만일 우리 삶의 종착역이 단지 죽음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궁극적인 끝이 죽음 혹은 무(無)로 회기하기에, 우리가 존재했는지 혹은 어떻게 존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역사속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살 수는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은 자연적, 물리적 법칙에서 에너지가 소멸하는 것처럼, 그냥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삶의 종착역에선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당신의 삶은 보잘것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지식 발전을 향한 과학자들의 헌신이나, 육체적 고통을 줄이기위해 애쓰는 의학자들의 연구나, 세상의 평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나, 인류를 위해 바쳐지는 사람들의 희생도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앞에선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무신론이 진실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의미없고 허무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 희망이 없어진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제한된 우리 존재의 문제가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 예로, 악으로 부터 자유로와질 희망을 잃게된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이 존재하고 그가 우주를 창조했는데도 이렇게 세상에 악이 많을 수 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주지할 것은 세상의 많은 악이 타인을 향한 우리 스스로의 비인간성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두번의 잔혹한 세계전쟁은 가치발전, 진보를 향한 19세기 인류의 순진한 믿음에 제동을 걸었다. 

만약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설명없는 고통에 시달려야하고 그 악으로 부터 구원할 희망을 놓치게 된다. 
동일하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늙어서 병들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이 실존적 현실에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다. 
비록 대학생들처럼 젊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엔 쉽지 않겠지만, 우리가 젊은 나이에 죽지 않는다면, 노화와 질병과 그에따른 쇠약함과 싸워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당신은 죽음을 맞을 것이다.
무덤 너머에 어떠한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신론의 주장은 희망이 없는 철학인 것이다. 

셋째, 반면에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삶이 의미와 희망을 가질 뿐아니라, 신을 알게되고 개인적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된다.
생각해 보자. 무한 존재인 신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신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인류 전체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줄 뿐만아니라 당신 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정컨대, 물론 이러한 논리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바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이슈임엔 분명하다.
그래서, 만약에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란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비슷하다면, 이성적인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믿을 것이다.
다른말로, 희망, 의미 그리고 행복보다는 죽음과, 허망함 그리고 절망이 옵션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택하는 것은 실로 비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두 주장들의 증거가 동등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한 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이 글에서 나는 다섯가지의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삶의 여정속에 있는 여행자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을 이해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양한 우리의 경험속에서 납득이 될 수 있는 가설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I. 신의 존재가 우주의 기원을 납득이 가게 한다.

당신은 우주가 대체 어디서 부터 왔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왜 사물과 세상은 존재하지 않기 보다 존재하는가?
무신론자들의 전형적이 답은 그냥 세상은 영원한 것이고 그게 전부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잠시 한번 생각해 보자.
만약 우주가 결코 시작점 자체가 없었다면, 우주의 과거 사건의 수는 무한대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존재하는 사물”의 무한수라는 개념은 자기모순이라고 입을 모은다.
예를들어, 무한대 빼기 무한대는 무엇이 되겠는가?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자기 모순일 수 밖에 없다.
이는 무한대라는 것은 단지 당신의 생각속의 한 아이디어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20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불리는 데이비드 힐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한대 (infinity)라는 것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적 사고를 위한 어떠한 적법한 토대도 제공하지 않는다.
무한대라는 개념이 하는 유일한 역할은 단지 아이디어, 개념이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들은 단순히 아이디어나 개념이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에 과거 사건의 수(number)는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련의 과거 사건들은 영원이란 미궁 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없고, 반드시 시작한 시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천문학과 천체물리학의 다양한 발견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현대과학의 가장 괄목할만한 발견은 빅뱅 이론인데, 이는 우주의 기원이 영원이란 미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130억년전이라는 분명한 시점에 빅뱅이라고 불리는 천체격변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빅뱅이론을 통해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이 무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물리적 공간과 시간이 이 빅뱅에서 왔다는 얘기인데, 물리학자 데이비스가 주장하듯, 현대과학에 있어, 우주의 시작과 형성은 불완전한 어떤 상태에서 조직을 갖춘 어떤형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에서 모든 물질이 단번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절대적 창조점” 에 관해 받아들이 못하는 여러 다른 이론들이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빅뱅이론 만큼 설득력있게 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진 이론은 없다.
실제로, 2003년도에 알빈 보드, 알란 굿, 알렉산더빌레킨은 우주적 팽창가운데 있는 어떤 천체도 그 시작점이 영원일 수 없고 반드시 구체적인 시작점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빌렌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논증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인간을 설득시키는 것이고 증거는 비 이성적인 인간조차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란 말이 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에 기초할 때, 우주론자들은 더이상, 우주가 시작점을 지니지 않는 영원성을 지닌다는 주장을 고수할 수 없다. 우주적 시작점에 관한 문제는 그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옥스포드 대학의 앤토니 케니에의해 잘 지적되는데 그가 말하기를  
“빅뱅 이론 추종자들은 만일 자신이 무신론자라면 우주가 무로부터(from nothing) 무에 의해(by nothing)왔다고 믿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넌센스다. 무에서는 어떤 것도 창조될 수 없지 않는가?
왜, 어떻게, 무의 상태에서 우주가 탄생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했는가? 대체 우주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 우주를 시작케한 원인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칠 수 있다.

1. 존재하기 시작한 무엇이든 그 원인을 가진다.
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3. 그러므로, 우주는 원인을 가진다.

처음 두개의 전제가 참이니, 그 결론도 참이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우주를 야기시킨 첫 원인자는 논리적으로 얘기할때 자신의 존재를 야기시킨 다른 원인을 가질 수 없고, 불변하며, 시간에 초월한 비 물질적 존재여야 한다.
원인의 영원한 회기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첫 원인자만은 인과성에 매이지 않는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
(infinite regress of causes-원인에 원인을 찾다가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빠지는 딜레마) 
그리고, 그 스스로가 시간을 창조한 존재이기에 시간에 영향받거나 변화하는 존재여서는 안된다.
또한 그 자신이 공간을 야기(창조)시켰기 때문에 비 물질적 존재일 뿐 아니라 공간에 초월한 존재여야만 한다.

더 나아가서, 나는 그 첫 원인자는 인간적 품성의(personal) 존재일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무시(timeless)의 원인자가 어떻게 우주와 같은 시간의 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만약 그 첫 원인자가 필요 충분의 기계적 조건하에 있다면, 결과를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물의 어는 온도는 섭씨 0도 이하이다.
만약에 영원한 과거의 온도가 0도 이하였다면, 어떠한 물이 있었더라도 영원전 부터 언 상태여야 한다는 얘기다.
다른 말로 물이 영원전 부터 얼기 시작한 상태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에 원인이 영원한 어떤 것이라면, 그 결과도 마찬가지로 영원한 어떤 것이라는 얘기다.
원인(cause)이 시간이란 제한성 밖에 있으면서 그것의 결과(effect)가 시간 안에 생기기 시작하게 되는 경우는 그 원인이 그 존재 이전에 결정된(determined) 조건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시간속에서 결과를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영원 전 부터 앉아 있는 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아무때나 자유로이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우주의 시작을 야기시킨 존재가 이 우주를 초월해 있고 초월해 있어야만 하는 막연하며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심성과 의지를 지닌 창조자라는 것이다.
 
II. 신은 지적인 생명(intelligent life)을 위해 우주를 절묘하게 디자인 해 놓았다.

지난 40년동안, 과학자들은 현재의 지적 생명체가 빅뱅의 초기에 형성된 물리적 조건들의 복잡하고 절묘한 밸런스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발견해 왔다.
과학자들은 한때 우주 발생의 초기 조건들이 무엇이었던 간에, 지적생명체는 진화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존재가 칼 끝위에 서있는 듯한 절묘한 밸런스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지적 생명체는 말 그대로 우주의 시작 당시에 발생한, 이해가 불가능하고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잘 짜 맞춰진 법칙에 의존해 있다.

이러한 미세조정(fine tuning)은 두가지 종류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자연법칙이 수학적 등식으로 설명되었을 때, 당신이 중력 상수처럼 특정 상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수(constants)들은 사실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the laws of nature)들이 이러한 상수들의 다양한 범위의 가치들과 일관성을 통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상수와 아울러, 자연의 법칙들이 적절히 기능할 수 있도록 우주 시작때 셋업된 독보적 질량(arbitrary quantity)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엔트로피(entropy)의 양이나 우주의 물질(matter)과 반 물질(anti-matter)의 균형이 그러하다.
모든 상수들과 양(quantity)은 생명을 허용하는 아주 좁은 절묘한 범위 내에 맞추어져있다.
만약에 이러한 상수나 양이 머리카락만큼이라도 변한다면, 생명을 허용하는 균형이 깨질 것이고 생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 데이비스는 원자력의 약력(weak force)이 10^100에서 단지 한 부분이라도 혹은 중력의 세기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준다면 생명체 유지를 위한 환경 자체가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주의 팽창을 주도하는 우주적 상수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10^120의 주변에 절묘하게 맞추어져 있다.
옥스포드 대학의 로저 펜로즈는 우연에 의해 존재할 만한 빅뱅의 저 엔트로피 조건을 10^10(123)의 근처로 내다 봤다.
그는 “나는 물리학에서 그 정확도가 10^10(123)의 한 수에 근접한 어떤 현상도 생각해 볼 수 가 없다.” 라고 말했다.
이는 각 상수와 양만이 절묘하게 짜 맞춰져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서로를 향한 비율까지도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조건들이 마치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처럼 잘 맞추어져 있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우주의 놀라운 튜닝은 세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물리적 필연성(physical necessity)이고, 또 하나는 우연 (chance)이고 나머지 하나는 디자인 혹은 지적 설계이다.
첫번째는 모든 우주의 현상과 원리를 설명할, 알려지지 않은 어떤 체계나 이론(Theory of Everything;T.O.E.)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게 그냥 그렇게 되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확률은 애초에 거의 없었다는 이론이다.
반면에, 두번째 설명은 미세조정이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설명이다.
이 우주가 생명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된것은 단지 우연이고 그것을 누리게 된 것 또한 단순한 행운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번째 설명은 앞의 두 설명을 반박하며, 이 우주가 생명체의 생존과 보존을 가능케 할 완벽한 조건을 가질수 있게 만든 설계자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중 어떤 설명이 가장 납득이 가는가?
첫번째 설명은 수긍하기엔 너무 무리가 있다.
왜 우주가 이러한 상수와 질량을 가져야만 했는지에 관한 궁극적이고 물리적 이유를 전혀 대지 못한다.
데이비스가 말하길,

“아무리 물리학 법칙이 독특하다 해도 그것이 물리학적 우주의 독특성 자체를 설명하진 못한다.
물리학적 법칙은 우주의 초기적 조건들에 의해 출발되야 한다.
우주의 초기 조건들 자체가 물리학의 법칙과 일관되어 있는 스스로의 상태를 설명해 내지는 못한다.
그완 정반대로, 물리적 우주는 현재 가지고 있는 그런 조건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 조건들이 다를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껏 가장 영향력 있는 T.O.E.중 하나로써 슈퍼 스트링(Super String) 이론 혹은 엠(M) 이론은
특정한 조건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우주를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
사실 스트링 이론은 현재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10^500개의 각자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왜 관찰된 상수와 질량의 값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위한 필연적 값이여야 하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이다.

우주의 미세조정의 현상이 단지 우연의 결과물이라는 두번째 설명은 어떠한가?
이 설명의 문제는, 생명을 허용하는 조건들을 가지지 않는 우주가 나올 확률적 가능성이 너무나 높아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우주내에서 생명을 허용하는 조건을 지닌 천체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 수가 전체 우주의 규모에 비해 너무 작아서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무리가 있다.
그냥 단지 우연에 의해 그럴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생명이 어떠한 놀라운 미세조정을 요구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앞 마당에 놓인 자동차를 보고, 그냥 하늘에서 떨어졌을 거라며 설명을 회피하는 무책임한 처사와 동일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미세 조정된 세상에 대해서 놀랄 것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에 이런 특정 조건으로 우주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서 놀라고 있는 우리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존재하고있으므로 우주가 미세조정 되어 있음을 느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오류이다. 한 유사한 예를 통해 설명해 보자.
당신이 조작된 마약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어서 100인의 총격수 앞에 끌려나가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모든 총격수들은 당신의 당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이내 준비, 조준, 사격이란 소릴 들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귀를 찢는 듯한 총성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곧 자신이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100 명의 총격수 모두가 당신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냥 뭐, 저들 모두가 나를 맞추지 못한 것에 대해서 놀라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만약에 저들 중 누군가 나를 맞췄다면 나는 여기서 놀라고 있을 일도 없을테니까.
여기에 아직 내가 살아 있으니 저들 모두의 조준이 빗나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 뭐.”
물론, 당신은 이렇게 단순히 생각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곧바로 저들이 의도적으로 당신을 맞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100명의 총격수가 당신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죽었을 현실에 관해선 놀랄 일 아니지만, 살아있는 자신에 관해선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거기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적생명체를 위한 미세 조정된 우주가 나올 확률이 엄청나게 낮다고 전제할 때, 단지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고 치부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고 의도되었다고 믿는 것이 더 이성적이다.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뒷받침 되기 위해선, 우리가 보는 우주가 단지 하나가 아니라 우연적으로 발생한 엄청나게 많은 수의 다른 우주들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수용해야 된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우주(우주 앙상블 이론:World Ensemble hypothesis)들 가운데, 미세조정의 조건을 지니고 있는 우리 우주는 단지 한 우연의 사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우주 앙상블 가설은 두가지의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다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가 존해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보드, 굿, 빌렌킨의 주장을 되새겨보자.
계속적으로 팽창하는 우주상태에서 어떤 천체도 영원한 과거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의 이론이 이 앙상블 가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가 제한된 출발점을 지니기 때문에 그로부터 가능한 우주의 수도 제한되어야 한다.
그래서, 미세조정된 우주가 여럿 있을 것이란 가정은 확률적으로 무리이다.

둘째로, 만일 우리의 우주가 무한대의 우주들속에서 발생한 우발적 산물이라면,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우주를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
로저 펜로즈의 계산에 의하면, 우리는 미세조정된 우주보다는 오히려 우발적이고 무작위적인 충돌에 의해 발생한 혼돈적 태양계속에 있어야 한다.
(로저 펜로즈는 "완전한 닭 모이(utter chicken feed)라고 불렀다)
만약 우리의 우주가 우연적 사건으로 일어난 어떤 것이라면, 미세조정을 가진 우주가 존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주가 현재의 태양계 보다 훨씬 작은 규모여야하고 말들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튀어나왔다 사라지는 것 처럼, 혹은 영원히 작동하는 기계적 현상처럼 수 많은 기이한 현상들이 영속적으로 발생하는 실체여야 한다.
우주 앙상블 이론대로라면, 그러한 다양하고 기이한 모양새의 우주들이 쉽게 관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우주는 발견되지 않았고, 이는 우주 앙상블 이론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우주가 단지 우연적 사건에 의해 무작위적으로 시작되어 이토록 미세하게 조정되고 조화된 우주로 진화했다는
과학적 증거없는 막연한 무신론자들의 주장보단 이를 설계한 분명한 디자이너가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이성적이다.

이 두번째 주장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우주의 미세조정은 물리적 필연성 혹은 우연, 그렇지 않으면 디자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2. 우주의 미세조정은 물리적  필연성이나 우연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
3. 따라서,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III. 신은 세상의 객관적 도덕 가치를 납득이 가게 한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관적 도덕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
객관적 도덕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옳고 그른것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나치의 반유대교 사상은 비록 그들이 대량학살을 스스로 옳은일이라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나치들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하고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자를 설득하고 세뇌시켰다 하더라도, 그 도덕적 문제를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객관적 도덕 의식은 신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많은 유신론자들 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도 이 사실에는 공감한다.

예를들어, 현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무신론자 중 하나인 옥스포드 대학은 맥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수긍했다.

“만약 객관적 가치들이 존재한다면, 이는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그렇지 않은 주장보다 더 납득이 가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도덕이라는 개념이 신 존재 증명에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맥키는 신 존재를 거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가진 도덕성을 생물학적 사회학적 진화의 산물로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과학 철학자인 마이클 루즈는 다음과 같이 동의했다.
그가 설명하기를,

“도덕은 인간의 손이나, 다리 혹은 치아의 진화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객관적 도덕성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마디로 환상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얘기할 때, 자신 위에 혹은 자신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는 완전히 근거 없는 생각이다. 도덕은 그냥 우리의 생존과 번영 혹은 번식에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상에 관한 생각은 환상이다.”

19세기, 신의 죽음을 선언한 위대한 무신론 철학자인 프레드리히 니체는 그 정의를 삶의 모든 의미와 가치의 파멸이라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니체가 제대로 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신중해야 할 것이 있다.
문제는,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해 신을 믿어야 하느냐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우리가 신 존재에 관한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객관적 도덕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만약 우리가 신을 믿지 않음에도, 객관적 도덕가치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냐라는 것이다.

맥키와 루스가 언급한 것처럼, 신의 존재없이 객관적 도덕성이 존재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만약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존재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인가?
우리는 단지 아주 적대적이면서 무심(mindless)한 우주에서 극도로 미세한 먼지에서 비롯되고 진화한 자연의 산물이며
궁극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내에 개인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사라질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신론자들에 따르면, 강간같은 행동은 사회적으로 이로운 행위가 아니기기 때문에 진화 과정 가운데 금기사항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가지고 강간이란 행위가 진실로 잘못된 행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무신론자들의 이론은 사회적 영향을 제외하고는 강간이란 행위가 왜 잘못인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신 없이는 우리의 양심을 두드릴 어떠한 절대적 옳고 그름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객관적 가치는 정말로 존재하고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객관적 현실만큼 도덕가치의 객관적 현실을 부인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앞서 언급한 루즈의 주장은 기껏해봐야 객관적 도덕가치에 관한 우리의 주관적 인식이 진화했다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만약에 도덕가치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진화하고 형성된 것이라면, 도덕적 체계에 관한 우리의 점진적이고 완성되지 못한 이해는 물리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점진적이고 완성되지 못한 이해가 가져다 줄수 있는 악영향 못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객관적 가치를 수긍할 것이다.
루즈 자신도 고백한 것처럼, 어린아이를 강간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2 더하기 2가 5라고 믿는 자와 동일하다.

강간이나, 고문, 그리고 유아 범죄같은 행위는 단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위 정도가 아니다.
이들은 도덕 자체에 관한 도전이고 멸시다. 분명히 잘못된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평등 그리고 자기희생은 진실로 옳고 의로운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 가치는 신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객관적 가치라는게 존재한다면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이 신은 존재한다고 봐야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 수 있다.

1.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객관적 도덕가치가 존재할 수 없다.
2. 객관적 도덕가치는 실재로 존재한다.
3.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IV. 신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납득이 가게 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나사렛 예수는 놀랄만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신약 비판가들은 예수가 신의 자리에서 신을 대변하는, 전례없이 신성한 권위로 역사에 등장한 사실에 공감한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이 신성모독이란 이유로 그의 처형을 공모한 것이다.
그 스스로 신의 왕국이 이미 도래했다고 주장했고 이를 눈으로 느끼게하기 위해 이적과 신유의 사역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의 메세지에 관한 가장 확실한 표징은 죽음에서 일어난 부활이었다.
만약에 예수가 정말로 죽음에서 부활했다면, 우리는 신성한 기적을 손에 지니고 있는 것이고, 신이 참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은 그냥 믿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사안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의 부활을 증명할, 신약사가들이 인정한 세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
-그의 빈 무덤, 그의 사후 현시, 그리고 부활에 관한 제자들의 믿음.
이를 간단히 살펴보자.

첫번째 진실: 예수의 무덤은 주일 아침 그를 따르는 여자들에 의해 텅빈 모습으로 발견됐다.
부활에 관한 전문가인 호주 학자인 제이콥 크레이머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텅빈 무덤에 관한 성서적 진술을 믿는다고 한다.
반 달런에 따르면, 빈 무덤의 역사적 진술에 관해 반박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얘기한다.
주로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신학적 철학적 가설에 기초해 있다.

두번째 진실: 예수의 죽음 이후, 여러 다른 개인들과 그룹들이 그의 현시를 경험했다.
저명한 독일 신약 비평가인 거드 루드만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 후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났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건일 수 있다고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나 신자들만 본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 회의주의자들 그리고 그의 적들도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번째 진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지 말아야 할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활을 갑작스레 믿게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때 제자들이 처했을 상황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1. 지도자가 죽었다.
유대교 메시야론은 그 지도자가 이스라엘의 억압자에 대해 승리해야 할 존재였지
미천하게 범죄자로 처형당하는 인물로는 이해되거나 기대되지 않았다.

2. 사후에 관한 유대인들의 기존 믿음은 최후 심판날에 일어나야 하는 부활이지
또 다른 부활의 스토리, 즉, 죽음에서 영광과 불멸로 화하는 어떠한 스토리도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다고 강하게 믿기 시작했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루크 존슨은
“초대교회같은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선 강력한 변화 경험이 요구된다.”
고 했고, 저명한 영국 학자인 엔 티 라이트는
“이래서 나는 예수가 빈 무덤을 뒤로 한 채 일어나지 않고는 초대교회같은 놀라운 사건은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결론 짓는다.

이러한 세가지 진실을 부인하려고하는 시도는(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숨겼다거나, 예수가 죽지 않았다는 이론들) 대부분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을 뒷받침할만한 자연스럽고 납득이 가는 증거나 설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논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나사렛 예수의 부활과 관련한 세가지 팩트가 있다.
하나는 그의 빈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부활후 여러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고, 셋째는 갑작스럽게 형성된, 예수에 부활에 관한 제자들의 강한 믿음이다.
2.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으로 부터 일으키셨다는 가설이 윗 세가지 팩트를 가장 잘 설명한다.
3.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가설은 예수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4. 따라서, 나사렛 예수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은 존재한다.

V. 신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존재다.

물론 이것이 신의 존재에 관한 직접적 논증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의 존재를 논증이라는 방법이 아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을 통해 알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존 힉이 설명하는 것처럼 성경의 인물들이 신을 알아가는 방식이었다.

“신은 사람들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데, 이는 마치 생명을 소생케하는 햇빛이나 파괴적 광풍처럼 부인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인 것이다…
믿는자들에게 신은 추론된 개념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경험되어 알게된 존재이다.
그들에게 신은…마음에서 형성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실질적 영향을 주는 경험적 현실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신앙적 믿음을 “타당한 이유를 가지는 근원적 믿음(properly basic belief)” 이라고도 이해하는데, 이는 이미 존재하는 다른 종류의 믿음에서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모든 믿음 체계 자체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이 “타당한 이유를 가지는 근원적 믿음”의 다른예는 과거에 관한 믿음이라든지, 외부세계에 관한 믿음, 그리고 내 마음이 존재하는 것 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도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중 어떤것도 증명할 수 없다.
우리가 마치 경험하지도 않은 기억속의 사건들이나 우리가 아침에 먹지조차 않은 위 속에 있는 음식물처럼, 세상이 5분전에 창조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란 존재가 사실은 어떤 미친 과학자가 인위적으로 창조해낸, 실험관속에서 전기자극을 받으며 기능하는 뇌 덩어리가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당신과 함께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겉으론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고 행동하지만, 사실은 영혼이 없는 고도로 발달된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당연히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이러한 믿음이 아주 기초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게 그냥 토대없는 제멋대로의 확신만은 아니다.
그것은 확실한 경험이라는 것에 근간해 있다.
우리는 보통 사물을 보고 느끼고 들으면서 우리가 느끼고 있는 실체에 관한 기초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것이 근거없는 확신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보증된 사실이다.
비록, 이를 증명할 길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를 인정하는 것이 지극이 합리적이다.
만약 세상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달리 5분전에 창조되었다고 믿거나 당신이란 존재가 단지 실험관속에 있는 뇌 덩어리라고 주장한다면, 모두가 당신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믿음은 단순히 그냥 “기초적, 근본적”인 믿음일 뿐아니라 “타당한 이유를 가진” 근원적 믿음(Properly basic belliefs)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그를 찾고 경험한 이들에겐 “타당한 이유”를 가진 “근원적 믿음”이라는 것이다.

자, 다시한번 요약해보자.

1. 납득이 가는 근거에 형성된 믿음은 이성적 논리나 논증에 근간을 두지 않는 근원적 믿음일 수 있다.
2.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존재는 분명히 납득이 가는 근거를 지니고 있다.
3. 그러므로, 성서에 기록된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논증에 의거하지 않은 근원적 믿음으로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자,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의 존재에 관한 논증이란 것이 오히려 신 자체에 관한 우리의 관심을 산만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신은 자신의 존재를 당신에게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8)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이야기하는 신의 내면적 음성을 막을 외형적 증거들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듣기를 원하고 구하는 자에겐, 신은 반드시 그에게 즉각적 현실로 임하실 것이다.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5가지의 이유를 살펴봤다. 

1. 신의 존재가 우주의 기원을 납득이 가게 한다.

2. 신의 존재가 지적생명체를 위해 잘 설계된 우주의 실체를 납득이 가게 만든다.

3. 신의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객관적 도덕가치를 납득이 가게 한다.

4. 신의 존재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납득이 가게 한다.

5. 신의 존재는 우리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알려지고 경험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실, 신의 존재를 위한 부분적 증거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철학자중 한 사람인, 앨빈 플랜팅가는 신의 존재에 관해 이미 수십개의 논증을 내놓았다.
그에 덧붙여 나의 설명이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도움이 될만한 이유를 제시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 유신론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려해 봄직한, 납득이 가는 세계관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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